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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에 나서지 않은 스트라이커’… 브라질의 전설적 사기꾼, 카를로스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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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6. 29. 08:59

20년간 수십 개 팀과 계약하고도 거의 뛰지 않은 ‘가짜 선수’
실력 대신 연기와 이미지로 살아남은 사나이, 축구계 허점을 파고든 가장 기이한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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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인터뷰 장면. 실제 인물인 카를로스 카이저가 자신의 기이한 선수 경력을 회고하고 있다. / 사진 Trunk Films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브라질에는 펠레도, 지코도, 호나우두도 있다.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설이 된 또 한 명의 이름이 있다. 카를로스 엔히크 하포조(Carlos Henrique Raposo), 흔히 '카를로스 카이저'로 불리는 이 사나이는, 약 20년에 가까운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프로팀과 계약하고도 정식 경기에는 거의 출전하지 않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축구선수로 존재하고 싶었지만, 축구를 하고 싶진 않았다"고 말했다. 언뜻 허무맹랑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제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이는 그리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는 축구공을 거의 차지 않으면서도 다수의 팀 유니폼을 입었고, 심지어 팬클럽을 만들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카이저의 전략은 치밀했고, 시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데 탁월했다. 그는 팀 훈련이 시작되면 곧바로 '햄스트링 부상'을 호소하며 출전을 회피했다. 현대처럼 MRI 촬영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80~90년대 브라질에서, 선수의 진단이나 병원 소견서만으로 수주간의 결장이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카이저는 의사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짜 진단서를 만들거나, 팀 닥터가 의심을 품을 경우 병원을 바꾸거나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상황을 빠져나갔다. 그는 "뛰지 않아야 오래 뛸 수 있다"는 철학을 몸소 실천한 셈이었다.

경기에 나설 위기가 닥쳤을 때는 더욱 기이한 방식으로 출전을 피했다. 1986년 보타포구 시절, 교체 출전 명령이 떨어지자 관중석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시비를 벌이는 자작극을 연출해 퇴장을 유도한 일화는 유명하다. 경기는 시작도 전에 끝났고, 그는 감독에게 "관중이 감독을 모욕해 참지 못했다"며 충성심을 내세웠다. 오히려 그 진정성(?)에 감독이 감동했다는 후문까지 전해진다.

그는 스타들과의 친분을 철저히 활용했다. 카이저는 베베토, 지코, 카를로스 알베르토 등 브라질 축구의 전설들과 친구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실제로 그를 유망 선수라 믿고 클럽에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이저는 이들의 모임에 참석하며 사진을 찍는 등, 사회적 이미지 관리를 통해 '같은 레벨의 선수'처럼 자신을 포장했다. 언론과의 유착도 그의 전략 중 하나였다. 기자들과 친분을 쌓아 허위 인터뷰나 이적설을 유포했고, 외국 팀에서 제안이 왔다는 식의 허위 정보가 기사화되기도 했다. 이처럼 '실력'이 아닌 '이미지'로 선수 커리어를 이어간 셈이다.

해외 클럽과의 계약도 있었다. 프랑스 2부 리그 AC 아작시오(AC Ajaccio)에서의 계약은 대표적 사례다. 그는 현지 팬들 앞에서 훈련복을 입고 등장했으나, 기본적인 볼 컨트롤조차 능숙하지 못했다. 감독은 그를 공개 훈련이 아니라 단독 훈련 위주로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으로 출전이 어렵다'는 보도와 함께 그는 팀을 떠났다. 멕시코의 푸에블라, 미국의 엘파소 식스슈터즈와의 계약도 있었으나, 이 역시 단기 체류에 그쳤다.

카이저는 브라질의 플라멩구, 바스코 다 가마, 보타포구, 플루미넨시, 방구, 아메리카(리우) 등과 계약했고, 다수 팀에서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이적하거나 방출됐다. 그의 정식 출전 기록은 클럽마다 자료가 부정확하거나 누락된 경우가 많아 단정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사실상 출전한 적이 없다"고 평가된다. 그의 '커리어'는 라커룸, 치료실, 벤치, 기자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를 단순한 사기꾼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가 속인 대상은 개인이나 팬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축구 산업 구조 그 자체였다. 실력 검증 없이 추천과 평판에 의존해 선수를 영입하던 스카우트 시스템, 형식적인 메디컬 체크, 언론 플레이에 취약했던 구조 등은 그를 가능케 한 토양이었다. 그는 "클럽들은 항상 사람들을 속인다. 누군가는 클럽을 속여야 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시스템의 헛점을 가장 정교하게 파고든 사례였다.

그의 일대기는 2018년 다큐멘터리 'Kaiser: The Greatest Footballer Never to Play Football'로 제작돼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공개된 이 작품에는 지코, 베베토, 카를로스 알베르토 등 실제 그의 지인들이 등장해 당시 상황을 회고했고, 당시 축구계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줬다. 같은 해, 영국 언론인 로브 스미스(Rob Smyth)가 집필한 동명 서적도 출간됐다. 두 작품 모두, 축구계의 '허상'을 기묘하게 체현한 인물로서 카이저를 조명했다.

현재 그는 개인 피트니스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자신의 과거를 유쾌하게 회고하고 있다. "축구계가 요구하는 건 진짜보다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당시 브라질 축구 산업의 본질을 풍자하는 듯하다. 그는 축구공을 거의 차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축구계의 '이미지 구조'를 꿰뚫은 인물이었다. 축구는 단순히 그라운드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전장, 즉 이미지와 평판, 언론과 인간관계의 그물 속에서도 경기는 벌어진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카를로스 카이저는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축구계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인물이었다.

포스터
'Kaiser: The Greatest Footballer Never to Play Football'(로브 스미스 저) 표지. 실전 경기에 거의 나서지 않은 브라질의 축구 선수 카를로스 카이저의 실화를 다룬 논픽션.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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