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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울트라누스(Ultranus)의 두 얼굴, 창의적 극단성과 파멸적 극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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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14. 17:40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66회>
송재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극단성(extremity)은 지구인 고유의 특성이다. 일반적으로 극단성이란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지나친 욕망이나 생각, 말과 행동을 이르지만,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도전 정신과 불가능을 극복하려는 자기 계발 노력 역시도 극단성의 한 측면이다. 완벽한 음악을 구현하려는 연주자의 노력이나 세계 신기록을 넘으려는 마라토너 역시 인간 고유의 극단성을 보여준다.

살아 꿈틀대는 모든 것은 보편적으로 생명 보존의 본능과 종족 번식의 욕구를 갖는다. 인간도 결코 예외일 수 없을진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생명 보존의 본능에 거스르는 과도한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유독 인간만이 한계에 도전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는 지나친 욕망에 시달리고 과도한 언행을 보인다. 지구 위 모든 생명체 중에서 왜 인간만 극단적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달 탐사 후 지구로 떠나는 아폴로 11호
달 착륙과 탐사를 마친 아폴로 11호가 지구를 향해 떠나는 장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인류의 문명사 그 자체가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극단성의 산물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본능적 욕구 충족에 머물지 않고 본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위적 욕구를 추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예컨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 제국의 대수로나 콜로세움, 진시황의 거대한 무덤 등은 인간 특유의 과도한 욕구가 빚어낸 문명의 상징물이다.

지구 위에 살아가는 210만여 종의 동식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문명을 개창(開創)하고, 과학을 창시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역사적 발전을 이룩해 나간다. 왜 오직 인간만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그토록 휘황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근본 질문에 관해선 여러 이설이 난립하고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 특유의 정교한 사유 능력, 놀라운 상상력, 치열한 탐구 정신 등을 빼고선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1979년경 실탄 무장한 캄보디아 어린이들.
캄보디아 제노사이드의 한 장면. 1979년경 실탄 무장한 어린이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따르면, 인간은 선험적(a priori) 인식 능력을 타고났다. 선험적 인식 능력이란 외부 세계와 접촉하여 세상을 경험하기 이전에 세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이른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은 아무리 체계적인 훈련을 받아도 수학 문제를 풀거나 교향악을 작곡하거나 문학작품을 집필할 수가 없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리를 음악으로, 이미지를 그림으로, 지난 경험을 이야기로, 내면의 감정을 정교한 언어 표현으로 승화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을 타고났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적 사유 능력이 물질적 진화의 최고 단계라고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만약 인간의 인식 능력이 물적 진화의 산물이라면, 왜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여전히 본능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가? 왜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이란 종만이 다른 모든 동물과는 비할 바 없이 탁월한 지적 우월성을 갖는가?

노동을 역사 발전의 동력이라 여긴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인간의 집체적 노동이 호모 사피엔스의 우수한 두뇌를 갖게 된 근본적 원인이라 설명한다. 엥겔스의 설명에는 마르크시즘의 노동 가치설이 전제로 깔려 있다. 노동자를 역사의 주인으로 올려 세워야만 하는 이념적 필요에 이끌려서 인간 두뇌의 진화 과정을 단순한 노동 행위로 환원한 혐의가 짙다.

인류 역사의 경제적 발전 과정을 보면, 단순노동이 아니라 고도의 창의적 사유가 더 큰 공헌을 남긴 경우도 허다하다. 우주의 신비를 풀려는 호기심, 자연 세계의 원리를 살피는 관찰력, 다양한 경험을 융합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상상력, 내면의 감정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표현력 등이 인류의 두뇌 발달을 다각적으로 이끌었다는 설명이 더 자연스럽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개념화한 뉴턴은 호기심과 관찰력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과학도였다. 귀 먼 상태로 절대 음악의 경지를 넓히며 교향악을 작곡했던 베토벤은 소리의 세계에서 상상력과 표현력을 극단까지 끌어올린 음악가였다. 인간의 악마적 심리를 깊이 파헤친 도스토예프스키는 글의 세계에서 상상력과 표현력의 극점까지 갔던 문인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서 모든 방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열정과 의지가 인간의 두뇌를 극의 극까지 계발시켰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바로 그 점에서 인간 정신의 창의적 극단성은 문명을 일으키고 이끌어간 가장 근원적인 정신적 동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류를 공도동망의 나락으로 몰고 가는 인간 정신의 파멸적 극단성이다. 창의적 극단성과 파멸적 극단성은 인간 정신의 두 측면이지만, 표출 방식은 극적으로 갈린다.

지난 회 다뤘던 나치당의 유대인 학살이나 중국공산당의 우파 사냥은 인류 정치사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두 가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인류사 어느 사회에나 극단적 정치 범죄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제노사이드나 계급 학살과 같은 대량 살상의 기록을 보면, 다수 대중이 마음을 사로잡는 증오나 원한 등의 정치 감정과 우생학이나 계급이론 같은 거대 명분으로는 불충분하다.

정부 기관이 공적 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어 정치 감정을 부추기고 거대 명분을 퍼뜨리는 조직적 캠페인과 선전·선동이 없이는 그 정도 정치 범죄가 발생하기 어렵다. '감정+논리+선전·선동=정치 범죄'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논리'이다. 이성적 사유에 능숙한 합리적 인간이라면 더더욱 정치 범죄를 자행할 땐 더 정교한 논리를 요구한다. 나치 시대 인종주의 우생학은 멀쩡한 교양인과 상식인에게 인종 청소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 역사관과 마오쩌둥 사상은 문화혁명 시대 청년층에 특정 계급의 숙청이 혁명의 필요조건이라는 이론을 제공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대체 논리가 무엇이길래 현명하고 멀쩡한 일반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구 위에서 가장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는 호모 로퀜스(Homo Loquens)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정교한 언어로 복잡한 현실을 간단하고 정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바로 그 언어적 수월성이 호모 로퀜스를 호모 울트라누스(Homo Ultranus, 극단적 인간)로 몰고 간다.

울트라누스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호기심, 관찰력, 상상력, 표현력 등 인간 정신의 창의적 극단성은 울트라누스의 정면이라 할 수 있다. 창의적 극단성을 발휘했기에 지구인들은 신석기 농업혁명에서 증기기관의 산업혁명을 지나 인공지능의 디지털 혁명까지 나아가고 있다.

반면 스스로 친 언어의 덫에 걸려 극단론의 함정에 빠져드는 인간 정신의 파멸적 극단성은 울트라누스의 배면이라 할 수 있다. 파멸적 극단성이 발현되기에 지구인들은 세계 전쟁을 치르고도 냉전의 이념대립을 겪어야 했고, 다시 신냉전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지구인의 세계사는 창의적 극단성과 파멸적 극단성이 맞물리고 엇갈리고 뒤섞이고 대립하면서 복잡다단하게 펼쳐지는 울트라누스의 방랑기가 아닐까.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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