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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네 경기 소감은.
"축구가 묘하다. 가장 조심스럽게 준비한 경기에선 이겼고,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경기에선 3골이나 먹고 졌다. 기존 1부리그 팀과의 차이를 인정한다. 빨리 문제점을 개선해서 팬 여러분께 보답하겠다."
- 축구는 언제 시작했나.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반 대항 체육대회 때 뽑혀서 나갔는데, 제가 좀 빨랐다. 축구부 코치님이 '축구 하면 잘할 것 같다, 같이 해보자'라고 권유하셔서 시작했다."
- 어느 학교였나.
"오류남초등학교다. 그런데 입부 1년 만에 팀이 해체해서 고척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는 문래중학교로 갔다."
- 영등포에 있는 문래중, 문일고를 다니다가 원주공고로 전학했다. 원주공고는 전통의 축구 명문고는 아니다.
"문일고 1학년 때 축구를 포기했다. 그 와중에 원주공고 왕선재 감독님이 연락주셔서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연세대를 졸업한 왕선재는 당대가 인정했던 태크니션이다. K리그 한일은행 시절, 국내 최초로 노스텝 페널티킥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체격과 체력을 강조하던 당시의 한국 풍토를 생각하면, 그는 어쩌면 시대를 잘못 만난 선수였는지도 모른다.
- 축구를 그만둔 이유는.
"제가 진짜 잘하는 선수였다면 끝까지 버텼을 거다. 다른 선수들을 보니 소질도 많았고, 다들 저보다 확실하게 잘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축구를 계속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당황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팀을 나왔다."
- '축구를 끊은' 기간은.
"한 1~2개월 정도다. 그런데 축구가 하고 싶더라. 원주에서 연락을 받고 바로 짐 싸서 내려갔다."
- 원주공고 졸업 후 프로도, 대학도 못 가고 중간에 붕 떠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당시에 부산 MBC배가 열렸다. 지금도 한다. 고등학교 대회다. 그 대회에서 어떻게 눈에 띄었는지 부산 동아대로 갈 길이 열렸다. 그때 부산 대우로얄즈 신우성 스카우터가 '프로에 와서 한번 제대로 해봐라, 가능성이 있다'라고 해서 테스트를 보러 갔다."
- 결과는 좋았나.
"1995년 입단해서 2경기를 뛰었다. 제가 어린 선수였지 않나. 조덕제, 하석주, 이민성, 이정효, 정재권 등 엄청난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는 자체만으로도 축구가 쑥쑥 느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력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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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원래는 SK 출신들이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최근 몇 년 동안 대우 출신들이 약진했다."
- 역시 대우 출신으로,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로 유명한 김남표 현 베트남 PVF 유소년센터 총감독이 있다.
"제 스승이다. 지금 한국 젊은 감독 중에 김남표 선배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축구협회 지도자 교육 과정 강사로, 그분이 만든 모델을 보고 축구 공부도 많이 했다."
- 김남표 총감독에 대한 인상은.
"이론적으로 해박하실 뿐만 아니라, 솔선수범하셨다. 대우 코치 때도 후배들을 가르친다기보다 매사 몸소 보여주셨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잔디 정리한다든지 6시에 조기 교육한다든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다."
- 중국에서 큰 업적을 낸 장외룡 감독도 수석 코치였다.
"그분도 마찬가지로 선수들보다 더 먼저 나와 훈련 준비했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했다. 요즘도 그분들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 연습생으로 입단했지만, 부산에서 꽤 오래 뛰면서 출장도 많이 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9시즌 동안 86경기 출전에 1득점이다. K리그 67경기, 리그 컵 등이 19경기다. 매년 10경기 정도 나섰던 백업 멤버였다."
- 프로통산 단 한 골인데 그 한 골이 역사적인 골이다.
"저도 다년간의 경험이 있었고, 코치진이 '병훈이에게 기회를 주면 자기 몫을 할 거다'라는 이야기를 감독님께 해주셨다. 기회를 받는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그 경기에서는 제가 팀과 선배님들한테 도움을 드렸다고 기억한다."
- 김상문의 크로스를 점프했지만 건드리지 못했고, 현재 한양대 정재권 감독이 헤딩으로 떨궈준 공을 착지 이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오른발로 찼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갔다.
"1997년 리그 최종전 천안 일화와의 경기다. 제 골로 1-0으로 이겼다. 비기거나 졌다면 전남이 우승이었다. 전남은 최종전에서 포항에게 2-1로 이겼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승점 딱 1점 앞서서 우승했다. 그 골 덕에 제가 10월의 MVP로도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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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자동차로 받았는데 기여도에 따라 모델이 달랐다. 나노스, 루비라, 레간자였다."
- 보너스로 받은 차는 어떻게 활용했나.
"자동차 준다는 소문이 나면, 전국의 딜러 한 20명 정도가 미리 와 있었다. 트레일러 도착하면 차 점검하고, '현금으로 얼마 줄 테니까 차 넘겨라'라는 식으로 흥정하고 거래를 마쳤다."
- 대우 시절 추억이 있다면.
"1998년 월드컵 끝나고 K리그 관중이 폭발했다. 고종수(수원삼성), 이동국(포항), 안정환(부산) 등을 보려고 소녀 팬들이 엄청나게 경기장을 찾았다. 엄청 많이 왔다. 숙소로도 팬들이 찾아와서 진짜로 요즘 말하는 물대포를 쏴야만 팬들이 해산할 정도였다."
- 부산에는 공격은 안정환, 수비에는 유병훈의 두 미남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정환이 형 보러 왔는데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저를 선택한 분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 한 분야에 몰입하고 경험이 쌓이면 '보는 눈'이 트인다고 하지 않나. 작년 2024년 시즌에 부산 팀 버스 운전하시는 분에게 들은 인상 깊은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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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30년 가까이 구단 버스를 몰았는데, 신인 선수가 버스에 타서 하는 행동을 보면, 저 선수는 몇 년 가겠구나, 저 선수는 국가대표까지 가겠구나, 하는 감이 온다'라고 했다. 유병훈 감독을 '매우 인사성이 밝고 성실했던 선수'로 기억했다.
"그렇게 표현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배들이 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저도 따라서 한 거다. 대우 로얄즈는 선수끼리도 잘 맞았지만, 주변 스텝들과도 인간관계가 끈끈했다."
- 예를 들면.
"식당 이모님들이나 주방 직원들이 우리를 정성으로 챙겨주셨다. 기사님도 모든 걸 선수단 위주로 판단하시니까 웬만한 사람은 기사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인사 잘 드리고 명절 때 약소한 선물 챙겨드렸다. 이런 걸 다 부산에서 선배들에게 배웠다."
- FC안양도 가족같은 분위기로 유명하다.
"그렇다.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다. 따뜻하고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런 점이 시너지를 낸다."
- 2005년 대우에서 국민은행으로 이적해 2010년까지 뛰고 은퇴했다. 병역은 어떻게 완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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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시절 기록은.
"6시즌 23경기 출전 2골 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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