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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잇는 세대의 손길... ‘박을복·오순희·오세정’ 3세대 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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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5. 11. 13:13

전통의 손끝에서 미래의 감각으로, 세 세대의 예술 여정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결, 서로 다른 언어로 짜낸 예술의 직조
집으로 가는 길
박을복, 「집으로 가는 길」, 혼합매체 자수. 실크실의 광택과 유화적 질감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박을복의 대표작으로, 서울 우이동의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를 배경으로 삶의 장소와 감정을 직조한 회화적 자수의 정수를 보여준다. / 박을복자수박물관 제공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박을복·오순희·오세정'展이 12일부터 6월 5일까지 서울 강북구 박을복자수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기획전은단순한 가족의 예술 계보를 넘어서, 전통에서 현대, 디지털까지 이어지는 매체적 전이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감정의 공통 분모-'그리움'을 탐색하는 시도다. 이 전시는 1세대 자수예술가 박을복, 2세대 섬유예술가 오순희, 그리고 3세대 다매체 작가 오세정까지, 세 명의 여성 예술가가 서로 다른 시대적 감수성과 조형언어로 풀어낸 '기억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리다. 특히 이번 전시는 젊은 세대이자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오세정(Sae Oh)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선과 감각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기획전의 기저에는 오세정에게까지 이어진 유산이자 정신적 기반인, 박을복과 오순희의 흔들림 없는 예술철학이 뿌리처럼 자리하고 있다. 박을복(1915~2015)은 한국 자수예술 1세대이자, 이 장르의 '현대화'를 이끈 선구적인 인물이다. 1937년 동경여자미술대학 자수과 졸업 이후, 전통 자수의 맥을 잇는 동시에 서양화의 색채와 구도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물었다. 특히 '국화와 원앙', '정(靜)', '얼굴들' 등의 작품은 회화적 구성을 자수에 이식시킨 독창적 실험이자, 감각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의 대표작 집으로 가는 길은 실크 실의 광택과 유화적 질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복합매체 자수 작품이다. 서울 우이동 집 뒤편의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가 배경으로 담긴 이 작품은 단순한 풍경의 재현을 넘어서, 삶의 장소와 감정의 근원을 동시에 호출한다.

동행 동행자
오순희, 「동행」(좌)·「동행자」(우), 자카드 위빙, 섬유에 염색. 색과 질감이 다른 두 경사를 교차시켜 직조한 이 작품들은, 섬유 속에 감정의 층위를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 박을복자수박물관 제공
그의 딸 오순희는 박을복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섬유예술이라는 확장된 장르를 통해 그만의 감각을 정립했다.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와 프랑스 장식미술학교에서 심화된 학문과 창작활동을 이어간 그는, 현대 섬유예술의 기술적 언어를 깊이 있게 체화한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동행과 동행자 시리즈는 자카드 위빙이라는 고도화된 직조 기술을 바탕으로, 색과 질감이 다른 두 경사를 하나의 구조로 엮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반복되는 인간 형상 이미지는 어머니와의 예술적 동행을 암시하며, 한 줄 한 줄 직조되는 섬유 안에 감정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다. 특히 자카드 위빙의 구조는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물성 안의 정서'를 상상하게 만들며, 섬유라는 재료가 단순한 장식성을 넘어 감정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편지들(Letters)
오세정, 「편지들(Letters)」, 2채널 영상 설치. 팬데믹 시기, 서로 다른 대륙에서 나눈 지연된 대화를 영상 언어로 풀어낸 작품으로, 거리와 시간의 간극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교차를 메타-몰입적 감각으로 구성한다. / 박을복자수박물관 제공
이러한 예술적 전통과 매체 실험의 토대 위에 등장한 오세정은, 가족 예술사의 새로운 지점을 연다. 그는 한국 중앙대학교에서 공간연출을 전공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에서 Digital+Media 전공으로 석사(MFA)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RISD에서 강의를 하며 교육과 창작을 병행했고, 현재는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Goldsmiths, University of London)에서 리서치 아키텍처(Research Architecture)를 전공하기 위해 출국을 앞두고 있다. 영상, 디지털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퍼포먼스와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오세정의 작업은 현대인의 감각과 기억, 감정의 동요를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해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편지들(Letters)은 팬데믹 시기, 다른 대륙에 있는 친구와 나눈 지연된 대화를 토대로 한 2채널 영상 설치 작품이다. 서울과 유럽에서 촬영된 영상이 서로를 향해 리듬감 있는 불협화음을 이루며 상호 마주하는 방식은, 지연된 친밀감 속에서 보류된 감정을 추출하고, 그것을 하나의 시적 경험으로 전환한다. 오세정은 이 작업을 통해 관람자와의 메타-몰입적 상호작용을 설계하며, 디지털 시대의 '기억과 거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단순히 기술적 연출에 머물지 않는다. 오세정은 "인간 기억이 어떻게 구성되고, 해체되며, 다시 재조립되는가"에 집중하며, 이미지와 사운드, 텍스트를 수집하고 조합해 감각의 구조를 탐색한다. Transitory Void (보스턴 Cyberarts Gallery), No Longer Transparent (RISD 갤러리), 그리고 서울의 CICA 미술관과 Floor_에서 열린 개인전들을 통해 오세정은 디지털 이후의 감각지형을 직조해왔으며, 미국의 Monson Arts Residency를 통해 국제적 활동의 영역도 넓혀가고 있다.

결국, '박을복·오순희·오세정'展은 예술의 외형이 어떻게 바뀌든, 인간의 감정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살아남고 계승되는지를 탐구하는 전시다. 실에서 직조로, 그리고 픽셀과 코드로 이어지는 감정의 이음은 박을복의 손끝에서 시작되어 오세정의 감각적 실험으로 이어진다. 세 작가는 각자의 시대에서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풀어냈고, 그 감정은 이 전시를 찾는 이들의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반응할 것이다.


포스터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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