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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수레바퀴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간 근대문명의 가치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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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2. 09. 18:26

외계인에게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27>
최초의 근대적 세계지도
1572년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 1527~1598)가 제작한 최초의 근대적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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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수레바퀴 논쟁과 제국적 통합의 논리

이미 살펴봤듯 20세기 초중반 고고학계는 수레바퀴의 발명과 전파 과정을 놓고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수레바퀴 논쟁'은 서구 열강이 발호했던 19~20세기 세계사와 무관하지 않다. 1913년 대영제국은 전 세계 인구의 23%에 달하는 4억1200만명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전 세계 영토의 거의 4분의 1을 영토적으로 지배했다. 대영제국은 활발한 자유무역과 적극적 문화교류를 역사 진보의 공식으로 제시했다. 거대한 세계 제국의 경영을 위해선 전체로서의 인류를 내세운 통합의 논리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폭력적 지배를 극복하고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수레바퀴 논쟁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확립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와 무관할 수 없다. 이민족 지배를 경험했던 여러 나라에선 지금도 제국주의를 단순히 악(惡)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제국 경영을 직접 했던 나라들에선 근대문명을 확산하고 보편가치를 선양했던 자기 조상들의 업적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 경제적 수탈을 질타하면서도 자유, 인권, 평등, 민주, 진보, 법치 등의 보편가치를 설파한 서유럽 근대문명의 긍정적 역할을 칭송한다. 돌이켜보면, 동아시아 엘리트 역시 대문명의 보편성에 공감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끈 청년 사무라이들은 "분메이카이카(文明開化, 문명개화)"를 외쳤고, 1910~1920년대 중국의 진보 사상가들은 "과학"과 "민주"를 부르짖었다. 근세 서유럽의 사상가들을 제창한 자유주의, 민주주의, 입헌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념은 수레바퀴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 점에서 '수레바퀴 논쟁'의 밑바탕에는 제국적 통합의 논리가 깔려 있다. 경제교류나 침략전쟁의 과정에서 퍼져나간 한 지역의 사상, 제도, 발명품 등이 다른 지역의 진보를 이끈다면 그 자체로 선(善)이라는 발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유럽 근대문명의 지구적 확산도 수레바퀴의 전파처럼 역사적 진보를 이끌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제3세계 지식인들은 그런 논리에 발끈한다. 그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역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이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1980년대 한국 역사학계에서 자본주의 이식설에 맞서서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은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서 전투적으로 한국사 특유의 내재적 발전 논리를 찾으려 했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인도, 베트남 등 국치(國恥)를 경험한 모든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지적 경향이다. 그 점에 관해서 앞으로 차차 다루기로 한다.

1861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교역하는 서양 상인들
1861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교역하는 서양 상인들. 우타가와 사다히데(歌川貞秀, 1807~1878) 작품.
◇ 역사가의 임무는 대체 무엇인가?

20세기 초중반 고고인류학자들이 벌였던 '수레바퀴 논쟁'을 설명하고 나자 미도는 역사가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역사가의 임무는 진정 과거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서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인가요? 실증 역사가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 역사란 본래 어떠했는지 세심히 따지고 캐물어 전체로서의 과거를 종이 위에 펜으로 기록하는 작업인가요? 그가 어느 나라 국민이건, 어느 지방 출신이건 진실, 오로지 진실만을 찾아서 한 치의 거짓도, 꾸밈도 없이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태의 진상이 참으로 본래 어떠했는지, 냉정하고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중립적으로 평가하는 일만이 진정 역사가의 사명인가요?"

미도의 질문을 붙들고 반성하지 않는 역사가는 기도하지 않는 성직자만큼이나 믿음직스럽지 않다.

이 세상 그 어떤 역사가도 실은 총체로서의 과거사를 알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역사가는 배워 익힌 습관에 따라 겉으론 과거사의 진상을 실증적으로 엄격하게 밝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 일개인이 생리적으로 두뇌에 담을 수 있는 지식이란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지식의 총량에 비하면 극소하다 아니 말할 수가 없다.

누구든 지난 역사를 언어적으로 인식하여 문자를 매개로 서술하는 순간 깨닫는다. 제아무리 진실을 쓴다고 떠벌려 봐야 실은 스스로 접한 과거사의 일 단면에 현미경을 들이대고선 "나는 이것을 보았노라!" 고독하게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을.

"미도님, 인생의 시간은 유한하고 두뇌로 처리될 수 있는 지식은 제한적입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책상머리에 앉아서 집중해서 책을 읽어도 한 사람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분량은 기껏 수만 페이지밖에 되지가 않습니다. 재판정에 불려 나가 성경책에 오른손을 얹고서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한 증인처럼 역사가는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기록하겠다고 선서하지만, 한 사람의 증언이 사건의 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듯, 역사가 일인의 기록을 과거사의 진실이라 여길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대체 역사란 무엇일까요? 지구인이 지구인의 역사를 쓸 수가 있는가? 지금껏 써왔듯 앞으로도 수많은 역사가가 역사를 써나가면 결국 역사의 진실이 밝혀질까요? 그 점에 대해선 늘 의심하고 있습니다."

◇ 역사는 정치의 시녀일 뿐인가?

총명하고 예리한 미도는 양심을 후벼파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갔다.

"만약 그렇다면 역사 서술이란 본래가 전체로서의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밝힌다기보단 오히려 특정한 목적에 따라 필요한 사실만을 선별적으로 추려내는 데에 있지 않나요?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요구에서든 꼭 밝혀내야만 하는 사실을 뒤지고 뒤져서 밝혀내는 목적·의식적인 지식 발굴의 작업이 아니냔 말이죠? 만약 한 직업 역사가가 어느 재벌 가문으로부터 제법 큰돈을 받아서 그 집안의 가족사를 아름답고도 멋지게 집필한다는 암묵적 계약 위에서 집필을 시작한다면 진실을 밝히는 역사서가 나올 리는 만무하지 않을까요? 국사(國史) 교과서 집필자들은 돈 받고 재벌의 가계사를 미화하는 역사가와 별로 처지가 다르지 않을 듯하네요. 노골적으로 '우리 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사회주의 강화를 표방하는 북한의 역사가나 '조국 근대화'의 목적 아래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를 부르짖는 남한의 역사가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그가 아닐까요? 결국 역사가란 정치적 사명을 띤 역사 교사인가요? 종족이든 부족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그가 속한 사회의 정치적 요구에 따라서 과거사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다수 군중의 뇌리에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특정의 역사의식을 주입하여 그들을 부족민, 시민, 국민, 인민, 공민 등등 원하는 형태의 인간으로 주조하는 역사 교사인가요? 그렇다면 역사가란 부족 훈장이나 국민 교사를 자임하는 정치적 선전원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순수하고도 날카로운 외계인 미도의 질문 앞에서 한 명의 지구인으로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역사 교과서에 빼곡하게 기록된 그 방대한 '사실들(facts)'이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에 따라 엄선된 이념적 벽돌들이라 할 수 있다.

낱낱을 따져보면 사실이라 해도 그 사실들을 집적하여 큰 구조물을 지으면 재벌 가문의 가계사와 다르지 않게 변질된다. 그렇다면 과연 지구인의 역사학이 진실을 밝히는 학문일 수 있을까? 정치적 의제나 문화적 편견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객관적 역사 서술이 가능한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역사학자가 일본어로 역사를 기술할 때 과연 다수 일본인의 통념이나 상식에서 벗어나는 반일(反日)의 역사를 쉽게 쓸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학자는 어떠한가?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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