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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호기심과 상상력, 문명을 일으킨 지구인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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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7. 21. 17:40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2회>
이 연재물은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송재윤 교수가 외계인에게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다. 매우 독특한 상상으로 들리겠지만 이 지구인의 세계사는 '지구 중심성을 벗어나 행성 사이'의 관점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만큼 매우 좁은 민족이나 국가를 떠나 인류의 보편적인 '객관적' 관점 혹은 더 큰 보편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송재윤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교를 거쳐서 2009년 이후 맥마스터 대학교에서 중국 근현대사와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11세기 중국의 국가개혁과 유가경학사의 관계를 조명한 학술서 Traces of Grand Peace: Classics and State Activism in Imperial China(Harvard University, 2015)와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한 영문소설 Yoshiko's Flags(Quattro Books, 2018) 등이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중화제국사의 정치 담론을 집약한 학술서적 Share and Rule과 "슬픈 중국"의 제3권 '대륙의 자유인들 1976-현재'를 집필하고 있다. <편집자 주>

산타크루즈 동굴 벽화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즈의 동굴 벽화. 대략 1만3000~9000년 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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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지구인의 문명사를 공부할수록 지구인의 능력과 의지에 더욱 경탄하게 된다며 외계인 미도가 내게 물었다.

"지구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서 이토록 놀라운 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지구인들이 어떻게 불과 수십만 년 만에 본능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교육과 학습을 통해 문화를 전수하며 방대한 지식과 기술력을 쌓아서 '우주 시대(space age)'까지 개막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기적을 가능하게 한 지구인의 원동력(原動力)은 무엇인가요?"
외계인 미도의 물음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870만종의 생명체 중에서 유독 지구인만이 본능의 세계를 벗어나 문명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호미니드(hominid, 초기 인류)의 화석을 분석해 보면 지구인들은 대략 930만년~650만년 전에 침팬지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갔다. 그런데 불과 1만1000 년부터 지구인들은 야생의 자연에서 벗어나 문명(文名, civilization)의 새벽을 열어젖혔다.

학자들은 문명의 조건으로 도시화의 진행, 국가의 형성, 사회계급의 분화, 그리고 문자의 발명을 꼽는다. 도시란 여러 집단의 많은 인구가 모여서 살아가는 밀집된 공간을 이른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던 정착민들이 더 큰 연합체를 이루면서 도시가 생겨났고, 사람들 사이 갈등과 마찰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발생하고 국가가 형성됐다. 문자(文字)의 발명은 국가의 행정적 필요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문명을 발생시킨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는 오늘날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서쪽에 놓인 레반트 회랑(Levant corridor) 지역이다. 오늘날 요르단의 북동부에서 발생한 나투프 문화(Natufian culture)에서 호밀 등의 곡물을 경작한 최초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곳에서 빵을 구웠던 흔적은 1만44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서남아시아의 농경 발생보다 4000년이나 앞선다.

본능의 세계에 충실한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지구인들은 문화를 일구고, 문명을 건설해 왔다. 왜, 대체 무엇이 지구인의 문화생활과 문명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어떤 관점을 취하냐에 따라서 여러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환경 변화와 지리적 조건을 문명의 발생과 역사적 변화의 결정적 요인이라 주장하는 학파도 있다. 뛰어난 천재와 위대한 지도자가 문명의 건설과 역사적 발전의 주동자라 주장하는 부류도 있다. 지구인의 철학적 반성 능력을 문명 발생의 근본 원인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가령 헤겔 같은 관념론자는 사유의 자기 운동이 변증법적으로 역사 발전을 이끈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관념론을 물구나무 세워서 유물변증법을 제창한 마르크스는 스스로 역사 발전의 보편법칙을 발견했다고 떠벌리며 계급투쟁이 그 원동력이라 주장했다. 역사 발전을 물적 토대로 환원하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적 가치나 종교적 에토스(etho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거리 교역과 다문화적 접촉이 역사적 발전을 추동한다는 주장도 널리 퍼져 있고, 정복 전쟁과 제국적 질서의 형성이 문명사를 이끈다는 사회과학적 이론도 있다. 정치적 지도력과 효율적 제도의 확립이 역사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론도 있다.

◇호기심과 상상력, 지구인만의 독특한

외계인 미도를 위해 지구인의 문명사를 쓰면서 나는 위에 열거한 그 어떤 이론 하나만을 옳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역사의 전개 과정은 너무나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단일한 이론 틀로 지구인의 세계사를 수미일관 전일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혹시 지구인의 치명적인 자만은 아닐까? 지금껏 지구 위에 태어나서 살다 간 지구인들은 대략 1170억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인구가 겪은 삶의 체험을 단순화시키면 진실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외계인 친구에게 지구인의 세계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최소 몇 가지 가설은 필요할 듯하다. 외계인 미도의 질문에 답한다.

"지구인의 문명사는 지구인 특유의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호기심이란 그저 궁금증 정도가 아니라 답을 알아내지 않고선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강력하고도 저돌적인 지적 욕구를 이릅니다. 못 견디게 저돌적인 호기심이 있기에 지구인들은 틈만 나면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1939년 독일 남부의 홀렌슈타인-슈타델(Hohlenstein-Stadel) 동굴에선 사람과 동물을 합쳐서 만든 상아 조상(彫像)이 발굴됐다. 4만년 전으로 소급되는 이 유품은 태고의 원시인들이 추상적 사유와 종교적 관념까지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 역시 지금의 지구인들처럼 밤하늘의 별들을 우러러보며 가장 근원적인 존재론적 물음에 휩싸여 이렇게 물었던 듯하다. "왜 지금 여기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꼭 있어야만 하는가?"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

'형이상학' 첫 문장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적었듯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 한다." 캐묻고 따지는 능력이 없었다면 지구인은 지금도 동물적 본능을 벗어났을 리가 없다. 지구인들은 호기심에 이끌려 문화를 일으켰고, 상상의 날개를 펴서 문명을 열었다. 그 점에서 지구인의 문명사는 호기심의 날줄과 상상력의 씨줄로 정교하게 짜인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와도 같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50만년 전 남아프리카에서 지구인들은 최초로 날카롭게 깎은 돌을 나뭇가지에 묶어서 창끝(spearhead)을 만들어냈고, 40만년 전에는 목재를 마찰시켜 불을 지피는 방법을 개발했다. 27만년 전 중앙아프리카에선 나무에 고정된 도끼가 발명되었으며, 14만년 전 북아프리카의 오늘날 모로코 지역에선 짐승의 힘줄 등에 끼우는 장식용 구슬(bead)이 만들어졌다. 지금껏 발견된 최초의 화살촉은 7만년 전 남아프리카로 소급된다. 4만8000년 전 동남아에서, 4만년 전 유럽에서, 1만2000년 전엔 알래스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화살촉이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빚어낸 신기술과 발명품은 들불처럼 빠르게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농경의 발생은 되돌릴 수 없는 혁명을 일으켰다. 지구인들이 농경을 터득하는 과정도 단순히 기후 변동과 환경 변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농경이란 장시간의 집중적인 실험 과정을 통해서 야생의 씨앗을 우수한 종자로 개량하는 전문적인 식물의 작물화(plant domestication)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농경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요컨대 문명은 호기심에 이끌린 지구인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일으켰다. "먹사니즘"에 매몰된 정치인들은 호기심이나 상상력엔 큰 관심이 없겠지만, 인공지능 시대 지구인들은 다시금 하늘의 별을 보다 우물에 빠졌다는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Thales)를 본받아야 할 듯하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지구인의 근대 문명을 만든 물리학의 거장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직접 먹고사는 비책을 논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근원적 호기심과 창의적인 상상력은 문명사의 축을 바꿔놓았다. <계속>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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