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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 <62> 옛 포구(浦口)의 풍정(風情) ‘황포돛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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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1. 19. 17:57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마지막 석양빛을 기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이 어디냐/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갈매기야 울지마라 이 마음도 서럽다/ 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황포돛대'는 진해 출신 작사가 이일윤(필명 이용일)이 경기도 연천의 포병부대 근무 당시 세모를 앞둔 12월의 눈 오는 날 밤, 향수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어린 시절의 고향 바다인 영길만을 회상하며 흘러가는 배에 슬픈 마음을 담아 황포돛대의 노랫말을 지었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해안 관광도로 중간 지점인 영길만에 세운 '황포돛대' 노래비 뒷면의 작품 설명이다.

그렇다. 진해 앞바다는 얕은 해수면과 구비진 해안선으로 예로부터 황금어장이었다. 풍광 또한 아름다워서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돛단배가 떠가는 그림 같은 장면이 늘 연출되는 곳이었다. 작사가 이용일은 군복무를 하던 시절인 1963년 겨울, 석양 무렵이면 돛을 달고 포구로 몰려들던 고향 바다의 고깃배를 떠올리며 가사를 쓴 것이다. 노래비는 이 같은 사연과 풍경을 토대로 세웠을 것이다.

'황포돛대'는 1967년 백영호가 곡을 붙이고 이미자가 노래를 부르면서 그야말로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같은 작곡가의 히트곡인 '동백아가씨'와 같은 음반에 배치된 덕분에 '황포돛대'의 인기도 덩달아서 더 상승세를 타게 된 것이다. 백영호 또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우리 대중음악계는 근대화된 트로트 계열과 미국풍의 새로운 음악이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대중의 감성도 두 갈래가 혼재한 상황이었다. 기존 트로트에 식상한 도시적인 대중의 마음을 서양 음악이 사로잡았지만, 오랜 농어촌 정서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었다. 미국 스타일의 음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옛 트로트를 답습하기도 싫었던 대중에게 이미자는 새로운 트로트로 다가선 것이다. 자고로 대중가요란 당대의 사회상과 대중의 정서를 가장 진솔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백영호, 박춘석 등의 작곡가들이 남인수, 이난영의 정통 트로트와는 결이 다른 혁신 트로트 곡을 만들어 이미자와 같은 신인 가수의 목소리에 실은 것이 성공적인 트로트 복고와 부활의 비결이었다. 이촌향도의 풍조가 일상화되었던 시절, 지향 없는 이별의 서정을 '황포돛대'에 비유한 문학성도 주효했다. 황포돛대는 정한과 애환이 서린 포구와 나루에 대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문인 정지상은 '송인(送人)'이라는 한시에서 '비 갠 언덕에 풀빛이 짙어가는데(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임을 보내는 슬픈 노래가 이는구나(送君南浦動悲歌)'라고 읊었다. 현대의 조지훈 시인과 박목월 시인도 각각 '완화삼'과 '나그네'라는 시를 통해 강나루의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나그네의 외로운 여정을 노래했다. '황포돛대' 노랫말에도 석양빛이 드리워졌고 이별의 정조가 짙게 배어있다.

황포돛배는 당시만 해도 바다뿐만 아니라 내륙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한강을 비롯해 낙동강과 영산강 등에는 하루에도 수십 척의 황포돛배가 쌀과 소금 그리고 특산물과 해산물을 싣고 오르내렸다. 황포돛배는 또한 인구이동과 문화교류의 여객선 역할을 했던 우리나라 강문화의 상징적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황포돛배'가 아닌 '황포돛대'인 것 또한 고도의 시적 은유인가.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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